ㅡ한국산문 8월호{ 여름날일 긴 것을 사랑한다}발췌ㅡ
.....긴 여름날의 오후가 달콤하고 행복한 것은 그것이 짧게 지나가는 생의 덧없음과
아쉬움에 대한 복수인 까닭입니다.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었던 것도 그 긴긴 여름날 오후의
낮잠 때문 이었겠지요.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었던 걸까요? 아니면 나비가 꿈에 장자가 된 것일까요?
팔월의 햇빛은 맹렬한 뜨거움 그 자체이지만, 그 견딜 수 없는 뜨거움은 잘 벼린 칼날이 뿜어내는,
몸을 오싹하게 하는 서늘함을 품고 있지요.
팔월의 나무들은 오로지 녹색의 잎만으로 쏟아지는 땡볕에 대응합니다.
텃밭에 나가 잘 익은 토마토 몇개를 땁니다.
토마토는 태양의 붉은 반점을 자랑스럽게 적자(嫡子)의 표식으로 둥근 몸에 두르고 있지요.
토마토들은 붉음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토마토는 간밤의 폭우에 튀어 오른 흙이 묻어있고,
햇빛을 오래 받은 탓에 토마토를 쥔 손 안에서 미지근한 열기가 느껴집니다.
토마토에 묻은 흙을 바지에 쓱쓱 문지른 뒤 과육을 베어물면 초록색 내부가 파열하며 즙이 턱밑으로 흘러내리지요.
그순간의 경이라니!
제가 깨문 것은 팔월의 냉혹한 햇빛이며,땅의 정수이고,태양이 익힌 둥근 우주지요.
한 번도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던 신기루와 같이 막연하던 행복이라는 것이
구체적 실감으로 다가오는 놀라움의 순간이지요.
우리가 불행한 것은 신이 우리에게 베푸는 행복의 조건들을
오감(五感)을 활짝열어 맘껏 받아들이지 못하는 장애 탓 아닌가요? ......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달라지는, 존재 내부에서 아주 미묘하면서도 돌연한 형질
변경이 일어나는 오후들이 있지요. 오늘은 어제와 분명하게 다릅니다. 낡은 건물의
일부를 개조하고 새로 칠한 듯, 존재의 내부가 쇄신한 느낌이지요. 저는 이미 너무 다른
존재가 되어 결코 어제의 나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한 번 흘러가버린 것은
돌아킬 수 없도록 되어 있지요. 그렇다고 그 오후의 시간에 거창한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천천히,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그리고 무뚝뚝한 사물과 존재들, 그 모든 것
들은 있는 그대로 존재할 뿐이지요.
여름날의 긴 오후는 충동, 도약 비상과는 거리가 멉니다. 어리석은 욕망과 피의 격동이 잦아든 뒤 찾아오는 관조,몽상 나태의 시간들이 있을 뿐이지요.
여름날의 긴 오후에는 어떤 영혼도 비명을 지르는 볍이 없습니다.
경미한 우울증,잠깐동안의 생기부족, 미량의 멜랑콜리 때문에 질식하는 영혼은
없겠지요.
햇빛은 눈부시고, 하늘은 옥양목을 잘 빨아 펼쳐놓은 듯 청신하고,
수목의 잎들은 바람에 찰캉찰캉 쇳소리를 내며 흔들거립니다.
우체부가 다녀가고 오접된 전화는 두 번 받았지요.
어제와 다를바 없는 오후의 시간이지요. 책상위에 쌓은 우편물과 서류들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여전합니다. 오대산 월정사의 풍경도 지나가는 바람에 맑은 울음소리를 내며 울었겠지요.
라디오에서는 리 오스카의 하모니카 연주곡이나 아니타 존스의 노래들이 정오의 희망곡으로
흘러나오고, 저는 의자에 앉아 깨어있는 것도 아니고 잠에 든 것도 아닌 상태에서 그것들을
흘려보냅니다. 그 몽롱한 오후에 몸을 꿰뚫고 지나가는 그 무엇이 있었던 거지요.
멜라닌 색소와 같이 영혼의 표면에 침착(沈着)하는 우울, 다정한 부재의 느낌들, 어떤 상실(이를 두개나 또 뽑았잖아)
때문에 일어나는 날카로운 통증들...인생은 ...그냥...지나가는 것이지요.....
긴 여름날의 한가로운 오후는 홍차를 마시거나 지루한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자거나 나른한
재즈를 듣기에 아주 좋은 시간입니다. "행동은 꿈의 누이가 아니던가?"(보들레르)위대한
업적들도 처음엔 어렴풋한 몽상, 몽롱한 꿈에서부터 시작하지 않던가요? 오후의 시간들은
저 바쁜 일상적 노동과 의무에서 우리의 손과 발을 해방시켜 공익과 상관없는 몽상과 사색,
혹은 말도 안되는 황당무계한 꿈들을 한가롭게 부화시키는 시간이지요. 거창한 준비는
필요없습니다. 조금 편안한 의자에 몸을 반쯤 누이고 홍차를 한잔 마십시다. 그리고 프랑시스
퐁쥬의 시집이나 이하시선(李賀詩選),아니면 노자의 도덕경이나 오정희의 단편소설을 나른한
손길로 넘기며 게으르게 뒤적거립니다. 설마 이하시선을 9급 공무원 채용고시 교재를 파고들 듯
너무 집중해서 읽는 사람은 없겠지요. 반쯤 졸며 읽다가 낮잠 속으로 슬그머니 미끄러져 들어가면 되지요.
기난과 힘든 노동의 수고에서 벗어난 몸은 오후가 베푸는 게으른 평화로 충만해집니다.
여름날의 오후가 긴 게 쓸쓸하고 덧없는 인생을 위로하는 기쁨이요 위안입니다.
.....................
그렇다!
내가 요즘.......
'그룹명 > 놀면서, 노느니, 놀이삼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1년은 언제 갔을까 (0) | 2012.01.11 |
---|---|
여름마당 (0) | 2011.08.31 |
꽃잔치가 났다 (0) | 2011.07.09 |
서울나들이 (0) | 2011.06.24 |
앞집...요정도만 되도 (0) | 2011.05.30 |